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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08-02 20: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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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 ③ 믹서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김영미 시인의 《나무 한그루》는 시인의 시와 짧은 단상으로 이루어진다. 시를 쓰게 되는 지점, 또는 시를 써 나가는 과정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수상은 시를 감상하는데 색다른 묘미를 주리라 생각한다. 일상적 삶에서 건져 올리는 시적 성찰과,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만상의 자연과 사물들이 어떻게 결합하여 시의 몸 안으로 스며드는지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공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다만, 시인의 글과 생각의 흐름에 따라 시가 먼저 또는 단상이 먼저 나올 수도 있다. 단상은 한 두 줄로 짧을 수도 있고 길수도 있다. - 수영넷 강경호 기자 -







믹서



원산지에 따라 생육사가 다른
각양각색의 과일들
믹서에 넣는다


스위치와 함께 눈 깜짝할 사이

격동의 한 세기가 몰려온다

굉음을 울리며

칼날의 검은 회오리 속으로 빨려든다

꿈결처럼

빨강과 초록, 극좌와 극우가 손을 잡고

주황과 연두,

중도와 보수가 섞인다

과육 속 붉게 영근 따가운 햇살이 섞이고

지중해의 염분과

아열대를 적시는 오후의 소낙비

몬순의 당도가 섞인다

기적처럼

껍질과 알맹이의 근원적 대립이 몸을 풀고

열 번의 만남과

스무 번의 헤어짐

마침내 모든 입자가 하나로 어우러진다

꿈결 같은

탁자 위, 한 잔의 코스모 폴리탄!


원심분리 되지 않는

그대와 나

믹서에 넣는다

뼈와 몸뚱이

비극처럼 회오리처럼

ON OFF ON OFF




여름철 주방기구의 주인공은 단연 믹서! 스위치를 넣고 유리용기 속에서 돌아가는 빨강 노랑 연두 초록의 과일들을 본다. 참 잘 섞인다. 순식간에 바나나, 자몽, 오렌지 등 다국적 과일이 한데 어우러져 맛있는 주스가 된다. , 달콤하구나, 샤워도 했겠다, 감미로운 한 잔의 주스에 기분이 살짝 up된 상태, 안락의자에 기대 마침 소말리아 다국적 부대 운운하는 티브이 뉴스를 본다. 아마도 이 지점이 의식하지는 못했지만 시의 제일 처음 시작인 것 같다. 주스의 맛을 혀끝으로 음미하면서 과일들은 국경을 허문지 오래고 그래서 더욱 다양해지고 맛있어지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의 현주소는 왜 이런가? 이 한 잔의 주스처럼 서로 어울려 다 함께 잘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뉴스를 보며 흘러든 이 생각이 전혀 정치적이지 않은 믹서와 또 그 속의 과일을 정치적인 함의를 가진 대상으로 보게 만든 연결고리가 된 것 같다.


과일과 정치라, 한 잔의 주스와 세계평화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 요소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다국적이란 낱말 또한 내 머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시는 결국 언어예술, 시인은 말을 가지고 노는 사람, 하나의 낱말, 한 줄 생각만으로도 시공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사람.


각기 다른 나라에서 자란 그들의 생육사에 집중한다. 아열대지방의 푸른 식물들이 보이고 아열대 기후의 특징인 오후의 소낙비가 한 차례 지나간다. 지중해가 끼어들고 연이어 지중해에 내리쬐는 햇살이 따갑게 느껴진다.


접시에 담긴 과일의 색깔에 주목한다. 이념대립의 양 진영이 떠오르고 붉은색 과일은 좌빨, 극우로, 초록의 키위가 녹색당, 좌편향 등 정치적 색깔로 변한다. 그리하여 나는 한 잔의 주스를 들고 차츰 정치적이 되어간다.


마지막으로 결국은 모든 것을 섞고야 마는 믹서의 역할에 집중한다. 지금까지 전개된 모든 상황을 믹서에 넣고 잘 버무리면 한 편의 시가 될 수 있을까? 백지와 연필을 꺼낸다. 본격적인 시작업에 들어간다. 행을 다듬고 짧게 길게 리듬을 조절한다.


정치적 이념대립을 과일의 껍질과 알맹이의 대립으로 비유하고, 이제 순수하게 과일들이 섞이는 모습을 어떻게 표현하면 될까에 골몰한다.


  껍질과 알맹이, 근원적 대립이 몸을 풀고

  열 번의 만남과 스무 번의 헤어짐


이 만족스런 표현을 얻을 때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 시에는 국제간에 대립과 갈등을 풀고 전쟁과 난민이 없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밑바닥에 깔려있고, 진보 보수, 좌파 우파, 여의도 국회는 그만 싸우고 모든 국민이 고루 잘사는 나라를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사항도 들어있다.


때때로, 자주, 정치적이 되는 나의 바람은 여기까지, 정치는 정치가에게 맡기고

끝이 짐작되는 영화가 밋밋해지듯이 시도 마찬가지.


마지막 반전을 위하여 언덕을 오른다.

나의 관심사는 언제나 가까이 우리, 바로 당신과 나.

어떡하면 좋은가? 어떡하면 동심일체, 당신과 내가 한마음일 수가 있을까? 우리가 어차피 분리될 수 없는 운명이라면 몸을 섞고 뼈를 섞는 몸부림이라도 쳐봐야 하지 않겠는가? 당신과 나를 섞어 맛있는 한 잔의 코스모폴리탄!---무관심이 되어버린 사랑의 고지를 탈환해야 하지 않겠는가? 각자 206개의 단단한 뼈를 가진 당신과 나, 믹서에 넣는다 on off, on off


후배 시인이 잔혹 시라고 인상을 잔뜩 찌푸리지만 내겐 가장 통쾌한 시다. 이 시가 그 해 시인들이 뽑은 <올해의 시, 100편>에 선정된 걸 보면 다른 이유도 있겠지만 이 통쾌함도 한몫했으리라 생각한다.


가만, 내가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미국말이다. 트럼프는 참으로 못마땅한 인간이고, 대화하자 해도 안하고 미사일만 쏘아대는 김정은, 이 인간은 또 어째야 되노, 트럼프와 김정은, 둘을 믹서에 넣는다.

초고속 3단 스위치 on off, on off 우두두둑 뼈 갈리는 소리 들린다.




김영미 시인이 보내온 자기 자기소개

. 1998년 계간 시전문지『시와사상』, 신인상 수상으로 등단

. 2004년 한국문예진흥원 창작지원금 수혜

. 2004년 제1시집 <비가 온다>발간 (출판사, 현대시 )

. 2011년 제2시집 <두부> 발간 (출판사, 시와 사상사)

.『시와사상』편집 동인 및 운영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 현재는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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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는 내가 즐겨 쓰는 아이디다. 오랫동안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고 지금은 자유의 몸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것을 좋아하고 높은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빗소리를 들으면 술 생각이 나고 무엇보다 빈속에 한 잔을 좋아한다.


수영넷=강경호 기자 suyeongnet@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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